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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 이란


이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잠실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테헤란로를 따라가면 나오는 강남역, 그곳에 있는 국립도서관 분관, 국기원 옆에 위치한 그곳에 입시를 위한 학습을 위해 다닌 적이 있다. 주로 지하를 따라 놓인 지하철을 이용하였지만 때때로 버스를 타기도 했다. 테헤란로에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낮은 빌딩들이 지금보다 훨씬 드문드문 서 있었다. 비어 있는 곳도 많았다. “게블레. 마호메트의 출생지이자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정확히는 메카에 위치한 ‘카바 신전’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시였다... 게블레 말고도 방향을 찾을 때 쓰는 물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게블레 나머’이다. 일반적인 나침반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바늘 끝이 가리키는 곳은 메카이다. 그 속에는 반대쪽이 없고, 남과 북이 표시되지 않으며, 오직 하나의 점만이 성지를 향해 무한히 뻗어나간다...” (p.13) 걸어가야 할 길을 그러니까 나아갈 방향을 가리키는 무언가를 갖게 된다면 좋을 것이다. 당시 테헤란로를 따라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의 나는 아무 방향도 모르는 체였다. 삼십 년이 흘러서 나는 여기 도착해버렸다. 시작점이 있어서 도착점이 있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반대쪽이 없고’, ‘오직 하나의 점만이 성지를 향해 무한히 뻗어나간다’는 ‘게블레 나머’를 하나 구입하고 싶어졌다. “‘잠시 앉는다’는 건 두 발로 길을 경험한 뒤에, 두 발을 멈추고 길을 회상하는 일이다. 길에 있었던 나를 돌아보면서 길에서 잠시 떠난 나를 확인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공원에 놓인 벤치 하나는 다른 공간을 만들어주는 작은 ‘넓이’이다. 시선을 둘러보게 해주는 반가운 ‘틈’이다. 벤치에 앉는 순간, 도시에 갇혔던 나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도시가 곁에 있으나 도시와 떨어진 기분으로 골목과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걸었던 방향이 더 잘 보이고, 걸었던 시간이 더 뚜렷하게 새겨진다. 약간의 간격. 잠깐의 공백. 몸 밖에서 일어난 일들이 몸 안에서 다시 일어난다.” (p.87) 책은 시인이 체류하였던 90여일 동안의 이란에서의 경험을 담고 있다. 우리에게 테헤란로가 있는 것처럼 이란에도 서울로가 있는데, 그 서울로는 우리의 테헤란로와는 달리 자동차도로여서 (그러니까 우리의 내부순환도로 같은 것 아닐까) 그 길에는 볼 것이 없고, 대신 서울공원은 가보아도 좋다, 는 식의 이야기들이 주로 실려 있다. 우리만큼이나 이란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는 시인의,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의 체류기인만큼 이란의 속내를 충분히 담아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을 터이다. “... 누군가는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난 상대의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본다. 지나치게 자신의 기준에 의지했으면서 ‘원래’ 그런 모습이었고, ‘당연히’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며 스스로 실망을 부추긴다. 하지만 어떤 모습은 무언가의 일부분이다. 일부분은 모든 모습을 대표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모습은 자기 마음대로 상대방의 모습을 기대하는 자의 당당한 모습일 것이다... 나는 테헤란에서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모습은 내가 모르는 모습과 늘 함께 있다는 사실을.” (p.181) 대신 다분히 느낌적인 느낌, 이라고 부를만한 상념들이 드물게 드러난다. 외진 곳, 정보마저 드문 곳 (시인도 거론하였지만 1979년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 이전의 자유분방하였던 이란과 지금의 이란을 비교하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현재와 과거가 뒤바뀐 것만 같은 묘한 경험을 제공한다), 이미지마저 희미한 곳에서 최소한의 앎으로 그래도 삶인 것처럼 살아가야 하는 이의 어떤 심경 같은 것이 종종 느껴지는 것이다. “... 그토록 뜨거웠던 여름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아무것도 모른 채 테헤란에 왔던 8월의 어느 날도 먼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국을 떠나면서 집에 있는 달력을 미리 11월로 넘겨놓았다. 여행이 끝난 뒤 달력을 한꺼번에 넘겨야 하는 순간이 조금 두려워서였다. 내가 없는 동안 있었던 일, 내가 없는 동안 쌓였을 시간이 달력을 넘기면 동시에 몰려올 것 같았다. 내 부재와 상관없이 집으로 찾아온 11월을 아무렇지 않은 척 만나고 싶었다...” (p.182) 특히나 시인이 그곳에서 머물 때 우리의 내부는 태풍 전야의 시기였다. 그곳에서도 이쪽으로 자꾸 뻗어나가려는 촉수를 거두지 못하는 시인의 심경이 (그것이 비록 이미 이쪽으로 돌아온 뒤에 쓴 것이라도) 군데군데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모험과 도전의 성정을 갖고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 시인이, 그곳에서 이쪽의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며 얼마나 안절부절의 마음이었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쳐 종종 안쓰러웠다.정영효 / 때가 되면 이란 / 난다 / 198쪽 / 2017 (2017)
난다의 걸어본다 13 테헤란
정영효 에세이 때가 되면 이란

여행이 아닌, 관광이 아닌, 바야흐로 산책. 느긋한 마음으로 이곳저곳을 거닐 줄 아는 예술가들의 산책길을 뒤따르는 과정 속에 저마다의 ‘나’를 찾아보자는 의도로 시작된 난다의 걸어본다 열세번째 산책지는 바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이다. 정영효 시인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해외 레지던스 프로그램’ 참여 작가로 선정되어 2016년 8월부터 11월까지 테헤란에 머무는 동안 쓴 글들을 엮었다.

다른 나라, 그것도 한 도시에서 세 달 동안 지내는 일은 꽤 흥미로운 사건이다. 테헤란에서의 ‘생활’ 혹은 ‘여행’. 그 사이에서 겪은 크고 작은 일들이 내용의 큰 줄기를 차지한다. 이란과 테헤란의 종교·정치적 상황에 대한 내용도 그 안에 담겨 있다.

각각의 장은 테헤란에서 마주친 ‘사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사물은 낯선 환경과 문화를 마주했을 때 가장 빠르게 그 ‘낯섦’을 확인해준다. 또 일상과 역사를 요약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 테헤란이란 도시를 한꺼번에 바라보기보다는 천천히 바라보기 위해 정영효 시인은 사물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대상이 된 사물들은 테헤란에만 있는 것들은 아니다. 테헤란은 이란을 대표하는 도시이자 이란 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에 등장하는 사물과 거기서 비롯된 생각은 테헤란뿐 아니라 이란에 대한 내용까지 뻗어나간다.

여행지의 사람과 사물과 풍경은 그곳의 분위기와 맞닿으며 고유한 대상으로 자리한다. 매일 지나치는 거리와 건물. 낯선 물건과 음식. 누구나 지켜야 하는 규율.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이념. 테헤란과 밀착된 이런 것들이 그를 자연스럽게 질문으로 이끌어냈다. 여행과 산문이 서로 힘을 보태어 나온, 여행과 산문이 적당한 거리로 서로를 교환하면서 탄생한 이 책을 통해 이란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들어가며 … 6

게블레-‘메카’로 향하는 도시 … 12
선과 벽-둘로 나눠진 세계 … 19
바르바리-매일매일 빵 … 24
비데 호스-이슬람식 화장실 이용법 … 30
외제 차-도우르 도우르 … 34
표지판-이슬람 혁명의 전과 후 … 39
택시-‘턱시’가 무서워서 … 45
스프링클러-여름을 이기는 방법 … 51
모스크의 문-말의 입구, 말의 출구 … 57
모금함-도움이 필요한 순간 … 64
석류-‘아너르’는 생생하다 … 71
페르시안 카펫-흉내낼 수 없는 이름 … 77
공원 벤치-테헤란을 이어주는 틈 … 84
케이블카-토찰산으로 가는 길 … 90
리얄-이란 돈은 어렵다 … 96
홍차와 각설탕-조화가 차이를 가져올 때 … 101
초대장-누군가를 부르는 일 … 107
루싸리-가리는 사람들, 가려진 시간들 … 112
타진-빵과 케밥에서 벗어나기 … 117
신문-보지 않고 믿지 않는 기사 … 123
아락-몰래 이어져온 전통술 … 129
세타르-일상과 함께하는 악기 … 134
벽화-상상이 없는 그림들 … 139
시슬릭-특별한 날에 양갈비 … 145
우산-준비물일까, 짐일까? … 151
물담배-‘카흐베 커네’로 가는 사람들 … 155
과자 상자-고속버스에서 받은 선물 … 160
게양대-이란 국기와 이슬람 깃발 … 165
바람탑-흙집엔 ‘버드기르’가 있다 … 171
피스타치오-알고 보면‘ 페스테’ … 177
비자-90일 동안의 테헤란 … 182
케밥과 맥주-이스탄불에서 테헤란을 떠올리며 … 186

나오며 … 1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