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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중독


20대 시절 심야 라디오 방송은 대부분 팝송을 들려주었고 극장에서도 외국 영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란 말이 있지만 그 당시 많은 젊음은 외국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자신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사이먼 앤 가펑클, 이글스, 퀸의 노래에 열광했고, 로버트 레드포드, 더스틴 호프먼, 다이안 레인 등이 출연한 영화를 즐겼기에 한국영화는 제목이나 감독의 이름 정도는 기억했지만 본 영화는 거의 없었다. 치기((稚氣) 어린 행동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책 ‘클래식 중독’을 읽으며 느낀 감정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인 조선희는 ‘한국 고전 영화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사용해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의 영화 16편을 영화감독 중심으로 쉽고 재미있게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대상자는 ‘이장호, 장선우, 하길종, 유현목, 이만희, 임권택, 신상옥, 김기영, 배창호’ 등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한 감독들로 그들의 비하인드 스토리 중심으로 글을 전개하기에 무척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저자 조선희는 3년 동안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일했는데 이때 옛날 한국 영화를 실컷 보았다고 한다. 이 책을 출간한 이유도 전직이 기자였기에 늘 새 것만을 탐했었는데 3년 동안 원장의 직무를 감당하면서 ‘깊고도 멀리 그리고 천천히 흐르는 한국영화사의 강을 트레킹 하면서 발견한 진기한 경험’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첫 번째로 이장호 감독을 언급하는데 영화 ‘바람 불러 좋은 날’을 통해 한국 영화 뉴웨이브의 개화(開花)을 이루고 이 영화를 명보극장에서 본 장선우나 김동원, 강우석 같은 쟁쟁한 이들이 영화감독의 뜻을 굳혔다며 이장호가 새로운 시대의 막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본 영화는 ‘어우동’ 한편만 기억이 되니, 그것도 야하다는 소문을 듣고 봤을 정도다. 고작 9편의 영화를 찍고 퇴출되었다는 장선우 감독의 영화는 한편도 본 기억이 없지만 ‘거짓말, 경마장 가는 길, 꽃잎’ 등이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그 당시 군사정부나 검열당국에 대해 저항했던 그의 작품 경향을 아방가르드 보다 다큐적 리얼리즘으로 보고 있는 저자는 그의 작품을 걸작으로 인정한다. 특히 그의 작품 ‘거짓말’을 일본 영화 ‘감각의 제국’을 감독한 오시마 나기사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동일시한다. 겉으로 보았을 때는 수위 높은 성애영화처럼 보이지만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운동권 출신으로 혁명적 이상주의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 1980년 광주 민주와 운동이, 일본은 1960년에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반대한 안보투쟁이 거대한 시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미국의 베트남 침략과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하는 68혁명이 일어나 기성세대와 국가권력에 항의하는 시위로 확대되었다. 장선우, 오시마 나기사가, 베르나르도 베르톨로치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의 사회와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노출 영화를 찍었다는 공통점을 이야기 하는데 과연 이런 영화 속에 심오한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관객이 얼마나 될까? 라는 의구심을 갖는다. 38살의 나이로 요절한 하길종 감독은 내 젊음에 가장 반짝이는 영화로 기억되는 ‘바보들의 행진’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영화 속에는 그 유명한 송창식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 등이 수록되어 있기에 지난 젊음을 떠올리게 한다. 또한 이 영화의 원작자인 최인호는 청바지, 생맥주, 통기타와 함께 청년문화를 이끈 상징이었다. ‘바보들의 행진’이 당국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할 것을 안 하길종 감독은 단성사에서 편집본으로 시사회를 열었다가 최인호와 함께 잡혀가 얼굴이 퉁퉁 부을 정도로 곤욕을 치렀고 필름은 상영불가 판정에 재심신청을 거듭한다. 이 때 30분 분량이 잘려 나갔기에 이야기가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았을 때 가슴이 터지는 듯한 청량감이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병태와 영철이 장발단속에 걸려 도망칠 때 흘러나오던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는 진정한 편집의 승리다. “왜 불러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은 왜 불러”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는 토라진 연인의 목소리에 마음 약해진 남자의 속마음을 표현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공권력으로 자유를 구속하는 군사정권을 향한 풍자였다.고전영화 넘버 1 으로 인정받은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도 공보부의 영화 담당이 가위를 들고 ‘빈민촌의 초라한 판잣집이 나오면 나라 망신이라고 삭제하고, 멀리 경무대가 보인다고, 엑스트라의 치마가 짧다고, 제기랄, 이란 말도 자르던‘(132쪽) 자유당 시대를 지나 4.19 이후 서울의 봄 1년이 한국 영화에 베푼 은혜라고 한다. 특히 유현목 감독은 부모자식 관계나 형제 간 우애나 부부의 정이나 연인관계가 모두 파탄 나는 이 영화를 통해 비참의 원인을 사회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는 것에서 감독의 시선을 읽을 수 있다. 단일영화가 1700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에 마냥 좋아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 고발적이고 리얼리티를 강조한 영화들은 개봉관 얻기도 어렵고 관객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꼭 사회고발적인 영화가 명작이라는 단정을 내릴 수 는 없지만 영화도 현실을 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것 보다 매력적인 클래식의 세계를 다루며 풍부한 자료와 취재 기록을 바탕으로 한국 고전영화와 영화인들에 대한 밀도 있는 접근을 시도한다. 영화 기자와 한국영상자료원장으로 활동하며 오랜 시간 영화와 함께 했던 저자는 뒤늦게 발견한 고전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깊이 있게 담아내 전해주며 최근 발표된 영화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층 더 진지한 의식과 사유를 느끼게 한다.

메시지나 전달 방식과 같은 영화 내적인 부분과 당시 영화계에서 나타난 심의 문제나 기술적인 부분 등을 함께 다루며 영화산업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사회문화적 측면이 작품의 제작이나 표현에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또, 한국 영화사에 중요한 획을 그은 걸작들과 그에 얽힌 숨은 에피소드들까지 만나볼 수 있어 지금은 쉽게 볼 수 없는 우리 영상문화의 유산들을 접하는 기회가 된다.


프롤로그

잊혀진 천재가 된다는 것
-종교가 그의 영화를 망쳐버렸던 걸까
-1980년대 한국영화의 전위, 이장호 감독

한국영화사가 가장 사랑한 러브스토리
-만들면 다시 새로워진다
-16편의 영화, 16개의 같고도 다른 「춘향전」들

어떤 아방가르드의 기억
-아까운 재능이 고작 9편 찍고 퇴출되다
-1990년대 충무로의 불량학생 장선우 감독

웃음 뒤에 남은 것
-바보들, 행진하다
-스트레스死한 히피세대의 스타 하길종

역사 속의 미아들
-왜 멀쩡한 영화인들이 군국주의 깃발 아래 줄섰을까
-발굴되는 역사, 친일영화·친일영화인들

진지함의 절정
-독립운동하듯 영화를 찍다
-「오발탄」과 영원한 모범생 영화학도 유현목 감독

혹사당한 영혼을 애도함
-무엇이 한 영화천재를 죽음으로 몰고 갔는가
-미완의 천재, 희대의 낭만주의자, 이만희 감독

가고 또 가는 길
-왜 아직도 임권택인가
-구세대가 전멸한 충무로에 100편의 영화로 남은 임권택 감독

뮤즈와 메시아의 만남
-영화보다 더 영화처럼 살다
-신상옥과 최은희, 그리고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검열의 시대
-감독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걸작 소설에서 ‘에로영화’로 전락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슬픈 악녀
-다섯 번 다시 보기, 마침내 하녀 편에 서다
-심리스릴러의 걸작, 김기영의 「하녀」

유혹의 맛
-애절하게 기적을 꿈꾸다
-이광수의 꿈, 신상옥 배창호의 꿈, 예수의 꿈

귀신영화의 교과서
-CG 이전, 한국 공포영화의 구석기시대를 만나다
-「월하의 공동묘지」와 최고의 악녀 캐릭터 도금봉

70년 만의 생환
-변사와 악단, 미국에 가다
-역동적이며 리드미컬한 소동극, 「청춘의 십자로」 리바이벌

엔조이 여성 변천사
-자유부인들, 어디로 가시나
-「자유부인」에서 「바람난 가족」까지, 집 나온 노라들의 운명

에필로그
엔딩크레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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